우리나라에는 현재 약 270개의 姓이 있다.
우리나라의 10대 성은 金-李-朴-崔-鄭-姜-趙-尹-張-林씨 로써 전체 인구의 64%이며, 이 중에서 김-이-박씨가 45%를 차지한다.
본관별로는 김해 김씨- 밀양 박씨- 전주 이씨-경주 김씨- 경주 이씨-경주 최씨- 진주 강씨- 광산 김씨- 파평 윤씨- 청주 한씨의 순이다.
중국의 성씨가 4,000개가 넘고 일본의 성씨가 10만개가 넘는 것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성씨는 그 종류가 많지 아니하고 특정 3개의 성씨가 차지하는 비율이 매우 높다.
우리나라에서 성씨가 사용되기 시작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.
<삼국유사>와 < 삼국사기>에는 고구려의 시조 주몽이 성을 <高>씨로 사용하였으며,
신라에서는 金-朴-昔 3개의 성이 설화 속에서 전해 내려오고 있다.
신라 제 24대 진흥왕(540~576년) 김진흥이 처음으로 김씨 성을 사용한 신라인으로 기록되어 있다.
신라 제 35대 경덕왕 (742~765년)때부터 중국식 이름이 보급되었고, 고려 태조(877~943년)때에 귀족들에게 성씨를 가지게 하므로써 우리나라의 성명제도가 자리잡기 시작했다.
1055년 고려 제 11대 문종(1046~1083년)때에는 < 姓이 없는 사람은 과거시험을 치를 자격이 없다>는 封彌制度가 시행되면서 부터 성은 벼슬길로 나가기 위한 필수 요건이 되었다.
주로 귀족 등 사회지배층만 성씨를 가졌기 때문에 조선 초기에는 성씨가 없는 사람이 전 인구의 90%에 달하였고, 조선 중기에는 약 40% 정도 였다.
임진왜란(1592~1598년) 과 병자호란(1636~1637년) 후부터 성씨와 족보가 없으면 상민으로 전락하고 군역의 의무를 져야하였기 때문에, 이 과정에서 호적과 족보를 위조하고 매매하는 일들이 비일비재 하였다.
조선 후기에 와서 1894년 갑오개혁으로 성씨가 대중화 되었고, 1910년 한일합방 직전인 1909년에 민적법이 시행되면서 누구나 성과 본을 가지게 되었다.
<매천야륵>에 의하면, 흥선 대원군(1820~1898년)이 성씨가 없는 사람 중에서 전주 이씨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모두 대동보에 올려 주어 전주 이씨가 10만명이 더 늘어나 크게 기쁘했다는 기록이 있다.
성씨가 없는 상민들은 주인의 성과 본을 따르거나 임금의 성씨를 따르다 보니, 대부분이 그 당시 주류를 이루든 김씨-이씨-박씨로 성씨를 취득하여 일부 성씨가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기형적인 성씨 구도가 된 것이다.
따라서 우리나라의 김 이 박 3대 성은 정상적인 친족관계로는 볼 수 없을 정도이다.
우리나라의 성씨는 현재 270개 정도이며 가장 많은 성은 김해 김씨이며 가장 적은 성은 청주 궉씨다.
이들 성씨는 모두 漢子로 표기할 수 있다. 각 각 성씨는 본관을 가지고 있는데 본관은 그 시조가 자리잡은 고향을 나타낸다.
내가 이름을 풀이하거나 이름을 지어준 사람들 중에서 자기의 본관-뿌리-고향을 가 본 이들은 많지 않았다.